건축가에 대해 딱 한 곳 나오는 내용. 자본론, 제7장 노동과정과  가치증식과정, 제1절 노동과정[또는 사용가치의 생산], p.236


거미는 직포공들이 하는 일과 비슷한 일을하며, 꿀벌의 집은 인간 건축가들을 부끄럽게 한다. 그러나 가장 서투른 건축가를 가장 훌륭한 꿀벌과 구별하는 점은, 사람은 집을 짓기 전에 미리 자기의 머리 속에서그것을 짓는다는 것이다. 노동과정의 끝에 가서는 그 시초에 이미 노동자의 머리 속에 존재하고 있던 [즉, 관념적으로 이미 존재하고 있던] 결과가 나오는 것이다. 노동자는 자연물의 형태를 변화시킬 뿐 아니라 자기 자신의 목적을 자연물에 실현시킨다. 그 목적은 하나의 법처럼 자기의 행동방식을 규정하며, 그는 자신의 의지를 이것에 복종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이 복종은 결코 순간적인 행위가 아니다. 노동하는 신체기관들의 긴장 이외에도 합목적적 의지가 작업이 계속되는 기간 전체에 걸쳐 요구된다. 즉, 치밀한 주의가 요구된다. 



생각하기에, 현재 한국에서 가장 심각한 질문. 건축은 무엇인가, 건축가는 누구인가. 






<말하는 건축가> 미공개 컷에서- 당신이 생각하는 건축이란?

sa 건축기행에 참가한 건축가들이 말하는 건축. 미공개가 참말로 적절하구나, 싶은 대목들이 있다. 비자본주의적 언사들. 



오영욱  짓는다는 것-아무 것도 없는 데서 눈에 보이는, 만져지는 뭔가를 하는 것, 그것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에 대한 고민과 사람들의 생각이 담겨있는 결과물을 만드는 것이다. 
어떤 건축가가 되고 싶은가? 훌륭한 건축가요. 
훌륭한 건축은 어떤 건축인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사람에게 어떤 식으로든 감동을 줄 수 있는 건축이다.  


고기웅  건축은 인간과 도시환경, 인간과 자연환경, 그 사이를 엮어주는 매개체, 인터페이스. 


하태석  건축은 자기 신체의 확장이다. 피부, 두번째 피부가 옷, 세번째 피부가 건축 공간이다. 공간 안에 있으면 자기가 보호받는 영역 안에 있다. 건물의 외피가 도시의 피부가 되는 것 같다. 


정현아  라이프죠. 건축이란 게 거창한 것은 아닌 거 같다. 결국은 일상적인 환경에 대해 관심을 가지는 것, 그것들을 여러 사람들이 좀더 어떻게 행복해질 수 있는가 인 것 같다. 생활하는 것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고, 생활을 조금씩 개선해나가는 것이다. 그런 일들이 즐겁고 재밌고 저도 행복한 것. 


이진오  제가 재밌게 할 수 있는 일, 건축은 제게는 제일 재밌는 것 중 하나. 그래서 직업으로 삼을 수 있고, 평생 할 수 있고, 힘들거나 할 때가 있겠지만 다시 힘을 받아 시작할 수 있는 종류의 것... 어렸을 때 서울의 변두리에서 자랐다. 옆에 벽돌공장에서 (친구들과 모여서, 혹은 혼자서 심심할 때) 벽돌을 훔쳐다 조금씩 쌓고 집 짓고 하는 일을 하고 놀았거든요.  


한형우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것에 대한 기억이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겠는데, 우리는 항상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수단으로 건축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역사적으로 그런 기간은 굉장히 짧다. 항상 우리와 같이 호흡하고 우리한테 기억을 주고 생활을 하게 만들어주는, 우리의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다. 쉬운 표현으로 문화. 


조재모  교과서 같은 대답이 될 것 같은데, 사회와 시대를 담는 그릇이다. 그렇기 때문에 건축이 독자적으로 존재한다고만 하는 것은 위험하다. 


김일현   건축이란, 의미있는 장소를 만드는 일이다. 소재는 굉장히 다양할 수 있다. 기억과 같은 무형적인 것일 수도 있고, 당연히 물성을 가진 재료들로 구성된다. 그러한 의미 있는 장소들이 늘어날 수록, 그 사회는 조금씩 더 행복해질 것이다. "건축"이란 행복한 장소를 만드는 노력이다. 


서현  이 시대와 사회에 대한 침묵의 증언자. 건물과 건축의 구분. 어떤 구조물이 필요한 용도가 사라졌을 때, "저거 철거해야 겠다" 라고 평가를 받으면 건물이고, 그 용도가 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저 구조물은 "아직도 보존의 가치가 있겠구나" 라고 사회적인 판단이 내려지면 우리는 그때 그것을 건축이라 얘기할 수 있다. 




‘미국 LA’를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는 ‘한국인 건축가 7인’의 그룹전 <INSIDE OUT: 7 ARCHITECTURAL THOUGHTS>을 개최하려고 합니다. 본 전시의 참여 건축가 7인은 30,40대 젊은 건축가들로, 건축가로서 성장하는 과정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또한 전시의 주제와 내용은 성장 과정에서의 결과물이자, 현재 진행형의 건축적 고민들입니다. 따라서 이번 전시는 한국 건축계는 물론, 국내외적으로 의미 있는 전시가 될 것입니다. 



 INSIDE OUT-7AT Poster.pdf  

http://www.insideout-7.com   



전시 개요 

INSIDE OUT: 7 ARCHITECTURAL THOUGHTS 

기간:  2012년 6월 8일~ 6월 28일 (전시 오프닝 6월 8일 오후 6시 30분) 

장소: 미국 LA한국문화원 

참여: 김경순 김동우 안주호 유송희 이상대 이웅희 임창석






< INSIDE OUT: 7 ARCHITECTURAL THOUGHTS >


기획 의도 및 배경


그룹 전시회, ‘INSIDE OUT: 7 ARCHITECTURAL THOUGHTS’는, 2010년 10월경 한국성이라는 화두로, Metropolitan Los Angeles에서 실무하는 한인 건축가 7명이 모이면서, 구체화되었다. 미국의 나성이란 도시에서 건축설계를 하고 있는 그들에게 한국성은 담론의 대상이기보다 일상이다. 작업이 지속적 모임과 상방간 리뷰 및 크리틱을 통하여 진행되었고, 이후, 2011년 5월에 LA소재 코리아타운 경계에 위치한 한국문화원으로부터 특별전시로 초대되어, 2012년 6월 8일부터 28일까지 2F 전시장에서 개최된다.


7인의 작가, 김경순, 김동우, 안주호, 유송희, 이상대, 이웅희, 임창석은 한국에서 건축을 전공하였고, (실무 후) 도미하여 대학원과정을 마친 후, LA 에서 실무중인 공통점이 있다. INSIDE OUT은 장소적 경계, 시간적 전환에 있는 현 상황에서, 문화 정체성의 발현을 위한 그들의 의지와 도전을 은유하며, 7 Architectural Thoughts는, 그 구체적 작업물로서, 건축 2점, 조경1점, 설치4점으로 제시된다. 미국 문화로 정착하는 과정에서 변성했을 한인 건축가 7인전은, Emerging하는 젊은 건축가들의 새로운 가능성과 발로가 될 것이다. (전시 코디네이터 및 참여 건축가 이상대)







문화적 담론은 시작되었다.


실험적이고 도전적인 젊은 건축가 7명이 ‘한국성’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미주사회에 화두를 던진다. 다양한 문화적 레이어가 혼재된 미국사회에 우리 민족의 문화적 관습을 어떻게 합리화 시키냐 하는것은 우리의 일상생활속에서 알게 모르게 수없이 부딪히는 작은 혼돈임에 틀림없다. 이러한 이유로 우리는 개인적으로 또는 한인단체를 통해 그리고 인식적으로 또는 무의식적으로 우리 고유의 문화적 가치를 인식하고 다양한 지역 커뮤니티와 다문화 환경을 기반으로 계승, 발전, 지역화시키려는 노력을 계속해 왔다. 이러한 몸부림은 비단 한인 커뮤니티뿐만 아니라 타인종 커뮤니티가 안고 있는 문제이며 지속적으로 행해지는 노력의 일환으로 보여지고 있다.


주류사회에서 꾸준히 경제적, 정치적 입지만을 넓히려는 한인 커뮤니티는 이러한 무의식적으로 내재된 가치의 편향으로 인해 우리 전통문화의 자부심뿐만 아니라 전통적 사고와 가치를 기반으로 발전해야 마땅한 한인 커뮤니티의 문화를 소홀히 대해 왔다. 지금 우리는 다민족, 다문화 사회에서 우리의 생활방식과 사고를 나름대로 접목시켜 유지하고 살고 있다. 하지만 정작 우리들 스스로 이러한 것들이 얼마나 다민족, 다문화 사회 속에서 미래지향적 가치를 가지고 있는지, 혹은 이러한 습관적 문화 행동들이 사회, 정치, 종교 등 미국의 모든 인문학적 가치들과 어떻게 융합되는지 하는 문제는 경제적, 정치적 가치의 기준만을 가지고 쉽게 결정 짓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건축문화로서 ‘프로네시스’ 는 지금부터 시작이다.


이러한 문제를 인식하고 있는지 없는지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제는 어느 정도 기반을 다진 경제적, 정치적 기초와 더불어 우리의 문화적 사고와 가치를 바라볼 여유를 가지야 할 때이다.  이번 전시회를 통해 우리 젊은 건축가 그룹이 ‘건축’ 이라는 문화의 한 부분을 가지고 작은 불씨를 지피고자 노력하고 있다. 건축이 산업의 일부분으로만 인식되고 있는 기존의 관념을 조금이나마 변화시키기를 희망하며 이러한 가치의 변화가 이미 우리들이 추구해온 기존의 가치들과 제로섬 게임이 되지 않음을 분명히 말하고 있다. 오히려 문화적 사고와 가치의 중요성이 우리가 속해있는 집단에 얼마나 경제적, 사회적 시너지 효과를 가져올지를 실험하려고 한다.


우리 고유의 문화적 사고와 가치를 다양한 문화적 레이어 속에 ‘어떻게’ 접합시킬지 그리고 지역화 시킬지는 우리의 몫이 아닐 것이다.  또한 이번 전시회를 통해 소개되는 우리의 건축적 접근 방법들은 하나의 시도일 뿐 완전한 해결점이 될 수도 없을 것이다. 한인 커뮤니티의 문화적 각성을 위해 또 우리 문화의 우수성을 알리기 위해 우리 젊은 7명의 건축가는 건축이라는 소재를 이용하여 그저 하나의 화두를 던지고 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앞으로도 지속적인 작은 건축전시를 통해 또 건축문화로서 시작된 작은 문화적 외침을 통해 우리 전통문화의 우수한 가치를 바라보는 시야를 넓히고 미주사회에서 전통적 가치를 지닌 한인 문화의 발전을 깊이 생각하고 있는 것은 확실하다.


이 작은 불씨를 위해 시작된 발걸음이 한인 커뮤니티에, 더 나아가 우리를 타산지석으로 삼을 타민족 커뮤니티에게 진취이고 지속적인 문화 ‘프로네시스’로 번져 나아가기를 희망하고 있다. (참여 건축가 김경순)

 

1961년 <건축가협회 뉴스>를 창간한 이래로, 한국건축가협회가 발행하는 <건축가>지는 올해로 50주년을 맞이한다. 이번 호가 통권 252호를 맞으니, 평균적으로 연간 5권씩은 발간이 된 셈이다. 초반에 <건축가>지를 일으켰던 시대정신과 어려운 상황에서도 끊이지 않고 나왔던 배경에는 총체적으로 한국건축가협회가 가졌던 여러 가지 사회적 역할과 역사적 기록을 담고 있다. <건축가> 편찬위원회에서는 역대 편찬위원장 및 편찬위원들을 모시고 세 차례 좌담회를 진행하였으며, 이러한 역사적인 기록을 담고 남겨서, 계승해야 할 것들과 교훈이 되는 것들을 밑거름으로 앞으로 <건축가>지의 방향과 자리를 점검하고자 한다.

 

 

창간에서 1960,70년대 <건축가>

1961년 4월 1일 <건축가협회 뉴스> 창간

1963년 3월 ‘건축가’로 제호 개칭(통권1호 발간)

1968년 <건축가>지 정부 추경 예산으로 재발간(통권 1호)

1970년 7월 <현대건축> 창간. 7월호, 8월호, 9~10월호, 11~12월호 발간

1970년 <건축가협회 뉴스> 4월호 발간

1972년 <건축가>지 3~4월호 (통권6호) 복간

1976년 <건축가>지 4, 5, 7/8, 9/10월호 발간 후 휴간

1977년 한국건축가협회 창립20주년 기념호 발간,

1978년 10월호, 11월호 발간, 1979년 결간 없이 격월 발간.

 

협회 창립과 <건축가협회 뉴스>의 발간

 

한국건축가협회의 <건축가>지 출발이라고 할 수 있는 <건축가협회 뉴스>가 1961년 4월 창간이 된다. 1961년은 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창설과 함께 건축작가협회가 ‘한국건축가협회’로 개칭(회장 김재철)하던 시점이다. <건축가협회 뉴스>는 ‘건축가’로 제호를 개칭하며 실질적인 통권1호가 1963년에 발간되는데, 정부 예산을 지원(1968년)받아 이어가기도 한다. 어려운 시기였던 만큼 정간과 복간을 거듭하면서도 건축가들의 발언의 장과 정보 공유의 장으로 역할을 시작한다.

 

“한국건축가협회가 시작할 당시, 건축설계사무소가 많지 않았어요. 일본 유학파 중심의 신건축문화연구소와 경성고공 출신의 종합건축이 대표적이었고, 한국건축가협회를 만들자고 발의하신 14분, 그 자체가 건축계였어요. 그리고 당시 건축 잡지라고는 건축학회지와 주택영단에서 나오는 <주택>지 정도가 다였어요. 그러다 보니 건축가가협회에서도 의무감이라는 것이 생기잖아요. 아마 동기를 그렇게 봐도 괜찮을 거에요. 건축에서도 일종의 문화적인 잡지라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수첩 같이 얇은 팸플릿을 만들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일제시대 때 교육을 받은 분들이 다 우리 선배이고 스승이셨는데, 한글로 글을 쓰는 것이 어려웠다. 아무래도 대필을 할 수도 있었고 그 분의 사상이 들어간 것이 아니라 그게 참 부진한 것이었어요(원정수).”

 

1960년대는 건축법 및 건축사법의 제정은 건축인들의 주요 관심사였고, 건축계에서는 국립종합박물관(국립중앙박물관)을 발단으로 현상설계경기에 대한 시비가 일기 시작한다. 곧 이어 정부종합청사와 여의도 국회의사당 현상설계공모는 설계저작권과 불공정한 조건에 대한 문제로 건축계를 뜨겁게 달구었다. 특히 부여박물관의 왜색시비는 전통의 계승과 건축의 창작과 모방에 관한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지금도 이어지고 있는 것이겠지만 그 때도 원고들을 내지를 않았아요. 의견들이나 말이 아무리 좋고 잘하는 것이라도, 기록이 되지 않고 글로 남겨두지 않으면 그냥 잊혀지는 옛날이 되어버리거든요. 지나고 돌이켜보면, 사람이 글을 남긴다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일이에요. 부여박물관이 사회적 관심을 받을 때도 김중업 씨는 신문이라던가 매스컴을 통해 글을 많이 남겼단 말이에요. 가협회는 왜 그런 기록이 힘들었는가를 생각해보면, 자신의 작품이라는 것도 누구나 부끄러울 수 있고 말 자체도 이래야 하느냐, 저래야 하느냐로 상당히 혼돈 시기였어요. 예를 들면 부여박물관이나 민속박물관에 대해서 논의를 하는 것은 의견의 좋고 나쁨을 떠나, 많은 논의가 되어서 기록이 된다는 것이에요. 그래서 ‘결론이 어떻다’ 라는 게 중요해지는데, 젊은 사람들한테는 스승 급인 사람이라 함부로 좋다, 나쁘다 발언을 못하고요. 동료들끼리도 그 얘기가 상당히 거북했어요. 그 당시 잘잘못을 떠나 그게 우리 현실이었던 것 같아요. 평론이 필요하다고는 했지만 멋있게 평론할 정도가 아니었고 글 쓰는 것도 그 정도가 안되었고요. 그런 것을 누가 하지도 않고 서로 눈치 보는 시대가 너무 오래 지속되어왔던 것 같아요 (안영배).”

 

“제가 할 때만 하더라도 김수근 선생이 회장으로 계시면서 저에게 위원장을 맡겼는데, 그 때만 하더라도 뭐 평론이라던가, 평론다운 평론이 없었어요. 우리 때만 하더라도 저는 ‘평론을 바란다’ 하는 것이 브루노 제비의 얘기를 주로 했거든요. 그러면서 <건축가>지가 다른 건축잡지하고 같은 맥락보다도 하나의 건축가로서 사회의 가는 방향 제시라던가 이런 것들을 제안해야 되지 않겠느냐는 생각이 있었어요. 그런데 그때 원고니 뭐니 그런 것이 안들어와요. 그래서 할 수 없이 독일 잡지들을 번역해서 지면을 메우기도 했어요. 그러면서도 국내 상황과 접목시키려고 했지만, 솔직히 말해서 <건축가>지를 메울 재간이 없어요. 그 다음에 당시 한국건축가협회가 상당히 영세했어요(주남철).”

 

1960년대 후반~70년대 중후반 협회 주관의 건축토론회, 세미나가 개최되는데, <건축가>에서는 기록/보존되지 못하는 측면이 있고 회원들의 작품 활동 소식, 정보 공유과 교류, 발언 광장의 역할을 하며, 1961~1979년까지 41권이 발행된다.’ 그리고 1970년대는 한국건축가협회의 기구 조직이 어느 정도 정비되고 안정되면서, 협회의 활동과 사업들을 정리, 기록하는 역할을 하는 건축가협회지의 필요성이 절실해진다. <건축가>지에 대한 관심이 증대하는데, 1970년에는 건축 전문지의 성격을 지향한 <현대건축>을 창간한다.

 

건축전문지 <현대건축>의 등장

 

1960년대만 해도 건축잡지가 많지 않았다. 대한주택공사의 전신인 대한주택영단에서 발간하는 <주택>이 한글 제호로 발간되었고, 건축학회 발간의 <건축>이 있는 정도였다. 그리고 1966년 11월에 민간 건축잡지로 <공간>이 창간되는데 , 민간 건축잡지로는 이보다 훨씬 앞서 현대건축사의 <현대건축>이 창간된다. <현대건축>은 이문보, 윤승중이 주축이었고 자금을 맡은 이민섭이 대표였다. 1960년 11월에 창간호가 나와 2호까지 발간된다. 


“대한건축학회 부회장을 역임하신 이문보 교수(동국대) 제안으로 잡지 한 번 만들어보자, 했는데요. 이문보 교수가 학생 때부터 학회지를 맡아서 했기 때문에 잡지에 관심이 있었어요, 제가 졸업하던 때가 1960년인데, 편집 체제도 없이 표지부터 광고까지 직접 드로잉을 하곤 했어요. 광고도 5-6개까지 싣고 꽤나 열심히 만들어서, 2호까지 책이 나오고요. 3호째를 인쇄를 다 해놨다가 5.16 후에 군소잡지 청산 프로그램에 걸려 폐간이 돼버렸거든요. 2호 때는 김태수, 조영무 선생 등도 참가해서 도움을 주셨습니다 (윤승중).”

 

그리고 한국건축가협회에서 1970년 7월에 발간된 <현대건축> 역시도, <건축가>지와는 달리 판매를 목적으로 <건축가>지와는 별도로 창간된 건축 전문잡지였다. 당시 포스트모더니즘과 같은 새로운 조류가 시작될 무렵, 그 이론들을 국내에 소개하는 역할을 하였으며, 그 또한 4호(11-12월호)를 끝으로 멈췄다. 1980년대 도래할 건축잡지 전성시대에 앞두고서 이른 서막을 올린 것이었다. 그 뒤 여러 가지 제한된 여건으로 <현대건축>은 1970년 11-12월호(4호)까지 발간하고 중단된다. 


당시 <현대건축>의 편집위원이었던 윤승중 명예회장은 “1970년대 초 엄덕문 회장께서 파격적이셨던 것이, 이사 중에 제일 막내이던 나한테 제작분과위원장을 맡기신 것하고, 당시 27살 정도 밖에 안된 김석철 씨 얘길 들으시고 <현대건축>이라는 책을 창간하게 하신 것이 굉장한 결단이었습니다. <현대건축>은 상당히 격식을 갖춘 정식 잡지였고, 김석철 씨가 거의 혼자서 주간을 하다시피 해서 만들었어요. 특히 그 때가 포스트모던과 같은 새로운 건축의 조류가 시작될 때였는데, 국내에 국제적으로 새로운 이슈들을 소개하고 한국건축에다가 많이 기여를 한 것이 <현대건축>의 큰 역할이라고 할 수 있어요. <현대건축>이 잘 진행이 되었으면 좋은 잡지가 되었을 텐데 4호 발행을 마지막으로 폐간이 되었지요. 실제로 건축계의 큰 사건이었고 한국건축가협회의 굉장히 비중 있는 사업 중에 하나였어요.”라고 전한다.

 

<현대건축>이 발간되는 동안 <건축가>는 발간이 잠시 중단되었다가, 그 후 1972년 3-4월호 (통권 6호)로 최창규 신임회장 때 다시 복간되어, <건축가>지는 1976년 12월호 (통권 27호) 발간 이후 또 다시 4월호부터 판형을 바꾸게 된다. 1977년 5월 30일 이사회에서는 준비된 과년호는 예정대로 발간하고, 1977년 분은 1월부터 6월까지 합본호로 발간, 7월부터 뉴스레터로 발간하며 재정 사성이 양호해지면 계획대로 발간한다. 그 후 1977년 9월호에서는 협회 창립 20주년 기념호를 발간하는 등 지속적인 발간을 위한 노력을 하지만, 그 후 휴식기를 거쳐 1978년 10월호(통권28호)부터 다시 격월간으로 발간되기 시작하였다.

 

물론 좋은 잡지가 없어서 좋은 건축을 만들지 못해 온 것은 아닙니다. 잡지가 할 수 있는 일의 한계가 있고 작가가 먼저 해야 하는 일들이 많이 있기도 합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에게는 참다운 의미에서 창조와 고뇌를 보고 들을 수 있는 광장이 너무 없습니다. 파행적인 사회구조, 고루한 교육, 발췌와 아류로 이루어진 시행착오의 반복 속에서 우리는 언제나 차선의 추구만을 시도해왔습니다.

오늘 우리들은 우리가 성실하고 부단한 노력과 집념을 갖고 오늘을 부닥쳐 갈 때 창조적인 전환의 계기를 이룰 수 있으리라는 의욕과 자신을 갖고 이 잡지-현대건축을 창간합니다. 모든것이 제한된 여건속에서지만 최선을 다해 좋은 잡지가 되도록 힘껏 일해 보겠습니다. - 한국건축가협회 <현대건축>의 창간호 발간사 중에서

 

“오늘 아침에 제호를 보니까 어느새 250권을 넘었네요. 참 장족의 발전을 했구나 하는 생각을 하는데, 2017년 UIA 총회에서는 그 동안 축적된 한국적인 요소를 가미한다던가 유도할 수 있는 그런 자리를 만들어야 해요. 제 생각에 표지부터 시작해서 한국적인 표현이 어디에서 표출될 수 있을까 생각하면 좋겠어요. 옛날엔 그래도 굉장히 고심을 했습니다. 전통건축을 신건축에 접목할 수 있는 것에 대한 생각은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안장원).”

 

“이제는 문화예술 측면에서 좀더 관심을 모아야 한다고 봅니다. 가협회의 원래 기본적인 정신이 전문 집단으로서 얘기뿐 아니라 대외적으로 많은 문화인들과의 호응을 받아서 문화에 대한 얘기도 하는 곳에 있거든요. 그래서 <건축가>지에는 작품이나 뉴스를 싣는 것도 좋지만, 좀더 위에서 보는 문화적인 행위와 분위기를 출판 활동으로 좀더 이끌어가는 것이 하나의 사명이라고 봅니다. 그리고 건축학회, 건축사협회, 건축가협회의 독자적인 역할을 찾아가야 하지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원정수).”

 

“제가 한마디 더 하면 앞으로 어떤 방향을 잡아야 하느냐, 인데요, 예를 들어서 어떤 의견에 대해 건축가협회, 건축사협회, 건축학회가 대립하는 것도 있지만, 한 단체도 항상 통일된 의견으로 되진 않아요. 건축가협회에서는 문화적인 측면에서의 모든 문제를 반대되는 의견도 나오고 전체적인 얘기를 쓰고 해서 판단은 독자들이나 회원들이 하게끔. 매스컴들이 너무 한쪽으로 치우치면 문제가 되잖아요? 그럼 뭐 대체적으로는 이렇다는 것은 있을 수 있지만, 너무 단체가 대립하는 식의 양상이 되면 그게 어떤 문제가 있냐하면 건축계의 의견이 통일되지 않아서 딴 사람들이 그냥 위에서들 마음대로 할 수 있다 이런 식으로 느껴진단 말이에요. 좋은 의견은 소수가 되더라도 좋은 의견이 좋을 것 같으면 클로즈업 될 수가 있거든요? 그런 의견들을 참작해서 너무 통일되는 의견으로 하려고 하진 말고 다양한 의견들을 같이 실어서 평가는 회원들이라던가 이런 사람들이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게끔 했으면 합니다.

 

“우리 도시 및 건축문화와 관계된 전체적인 큰 프로젝트를 앞으로 어떻게 방향을 잡아가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 사회적인 발언을 하면 저는 이런 생각도 했어요. 건축가에 대해 그만큼 사회적인 인식이 그만큼 안되어 있는 것도 우리가 평소에 발언을 많이 했으면, 건축가들이 인식이 되어 있으면 그럴 턱이 없지요. 그것은 우리가 사회적인 역할 내지는 발언을 너무 하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에 와서 우리가 스스로를 밟는 것이 아니냐, 하는 그런 자괴감이 드는 거죠. 최근에 일어나는 토픽들과 관계해서 우리 건축가협회 혹은 건축인들이 너무 입을 다물고 있다, 저는 그런 생각이 간절합니다(김린).”

 

1. 대한건축학회에서 발행하는 <建築> 창간호, 1955년, 2호 <建築>은 주택 특집으로 구성되어 있다. 자료제공: 윤승중

2. 대한주택영단 발간한 <주택>, 자료제공: 윤승중

3. 한국건축가협회 발간 <현대건축> 창간호, 1970년 7월

4. 민간에서 발간되는 건축잡지로는 최초인 <현대건축> 창간호, 1960년 11월, 현대건축사, 자료제공: 윤승중.

 

 

 




1980, 90년대 <건축가>

1980년 이후 10여 년간 격월간 발행 유지(1979년 1,2월호부터 정기간행물로서 기본 틀 형성)

1981년 <건축가>지 문공부 정식 출판물로 등록- 정기간행물 등록증, 1981년 3월 10일 (서)라-388

1981년 초 한국건축가협회 심볼마크 통일안을 제정(디자인 조성렬)하고 <건축가>지지에 사용

1983년 판형 변경. 4×6배판에서 국배판, 종전 32면에서 60면으로 증면

1987년 1-2월호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권명광 교수의 디자인으로 변경

1988년 3월호 ‘편집위원회’에서 ‘편찬위원회’로 이름 변경

1990년 11월호 통권 100호 발행, 이후 안정적으로 월간 발행.

1998년 연 7회 발간

1999년 연 3회 발간(3/4, 5/6, 11월호)

 

잡지 제작 시스템과 기반

 

1970년대가 <건축가>지로서는 수난기였다. 초기에는 <현대건축>이라는 특별 체제로 되는 바람에 협회지 발간이 잠시 중단 되었고, 중간에도 몇 번씩 결 권이 생긴다. <건축가>를 발간하는 환경은 굉장히 어려운 상황이었다고 전한다. 그때까지는 사무국장이 편집장의 역할을 하곤 했는데, 1970년대 말 이후에는 상황이 달라진다. 편집위원들이 실무까지 다 해야 하는 상황이 되면서, <건축가>지의 역할이 무엇인가를 다시 생각하게 되고, 또 편집 스텝에 대한 대안을 찾게 된다.

 

“알다시피 <건축가>지는 격월간이어서 시간에 맞춰서 정보를 제공해 주는 역할을 못하고, 책의 규모도 작고 독자가 회원으로 한정이 되어, 그 당시 500-600권 정도 밖에 제작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좋은 원고나 광고를 받는 것이 힘든 시기였습니다. 이미 <공간>이 60년대 말 창간이 되어 있었고 1970년대 중반에 <꾸밈>, 조금 지나서는 <건축문화>, <건축과 환경>, <플러스> 등 본격적인 건축잡지가 등장하게 되어 <건축가>지는 일반 상업적인 건축 저널과 경쟁할 수 없는 입장이었지요. 그래서 방침을 세운 것이 일단 건축가협회의 기관지로서, 협회 관련 뉴스, UIA의 지부니까 UIA에 관한 소식, 이 두 가지를 충실하게 소개하고(그것은 시간에 쫓기는 것도 아니어서), 두 번째는 건축가협회가 기획하는 몇 가지 사업들, 토론회라든지 건축대전, 한국건축가협회상 등에 대한 기록을 충실히 남기자, 우선은 시류에 맞는 전달 매체가 아니라 기록 매체로서 역할을 갖도록 하자, 그러한 것을 방침으로 세웠어요. 

또 한 가지는 1970년대까지 편집팀이 없었기 때문에 자세히 보면 책의 구성이 충실하지 못했는데, 우선 사무실 직원 몇 사람을 동원해서 원고 청탁에서부터 원고 정리, 편집, 인쇄소 관리까지 해결토록 하여 편집위원들에게 부담을 지우지 않기로 했습니다(윤승중).”

 

<건축가>지는 1981년에 정식으로 문공부에 격월간지로 등록이 되고, 1983년에 판형을 국제규격에 맞도록 4X6배판에서 국배판으로 판형 변경, 30면에서 60면으로 증면되면서 건축 전문지로서 면모를 갖추게 된다. “건축가협회의 사정상 전반적으로 큰 틀을 바꿀 수는 없었으나, 페이지당 4열이었던 것을 3열로 바꿈으로써 30% 정도 증면되는 효과를 얻고, 또 활자도 키우고 간격을 줄이고 해서 가독성과 밀도 있게 꾸며서 2년 동안 두 달에 한 번식 충실하게 발행한다(윤승중).”

 

또한 이 때에 협회 상징 마크가 통일이 되어, 모든 서식, 상패에도 적용이 된다. 한국건축가협회가 심벌 마크를 쓰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 중반으로, <건축가>지에서는 조금씩 다르게 사용되고 있었었다. 당시 편집위원이던 조성열이 이를 정리하게 되는데, 로고에 대한 작도법이 <건축가> 1981년 3, 4월호에 수록되어 있다. 또한 새롭게 표지를 단장하여 발간된다(1984년 3-4월호).

 

어려운 과정을 거쳐서 <건축가>지를 만들어내는 동안, 건축가협회지가 지속되려면 개인적으로 편집위원에게만 의존해서는 안 되는 것으로, 되겠다, 그래서 끝날 때쯤 이사회를 통해 제안이 된다. “건축가협회가 여러 가지로 형편이 어렵지만 그래도 <건축가>지를 존속을 시키려면 편집 스텝들이 적어도 한두 명은 있어야 되겠다, 했어요. <디자인>의 창설 멤버이기도 한 유방현 씨(이후 협회 사무국장)를 편집기자로 추천해 이사회의 동의를 받았어요. 그래서 <건축가>의 이러한 편집 기반을 다음, 황일인 편집위원장께 선물로 드렸지요(웃음)(윤승중).”

 

원로 건축가와의 대담

 

또한 1980년대 초반에는 원로와의 대화를 기획물을 연재하는데, 이천승, 이균상, 유원준, 강명구, 김희춘, 김경환, 신무성 선생까지 일곱 분1980년 5/6월호부터 1985년 7/8월호)의 육성 녹취가 기록된다. 이들 중 김경환은 협회 특별상의 하나인 아천 건축상을 남긴다. 대담을 통한 것은 아니지만, 김해경(1982년 11-12 월호)과 고 김정수 추모 특집(1985년 3-4월호)이 수록되기도 하였다.

 

“그 당시에 원로 건축가들이 많이 작고하시고 그 분들을 기록할 시간이 별로 없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당시 김정동 교수가 위원이었는데 그 분이 개인적으로 꽤 많은 자료를 가지고 있었다. 그 기획을 통해서 꽤 가치 있는 자료를 만든 셈인데 그분들이 자료가 아닌 기억으로만 하셨기 때문에, 정확하지 않은 것이 꽤 된다. 하지만 육성으로 녹음했다는 것은 상당히 중요한 가치가 있는 일이고 그것이 다음 번 황일인 편집위원장 할 때까지 이어졌다(윤승중).”

 

협회 분과위원회의 활동과 <건축가>

 

1980년대 중반 들어서도 여전히 가장 큰 문제가 첫째는 예산 조달이고 다음은 충실한 기사를 확보하는 일이었다. 한국건축가협회 회원 활동과 좀 더 구체적으로 연관시키면서, 분과위원회 활동을 <건축가>에 더 적극적으로 실을 수 있도록 한다. 한국건축가협회는 당시 UIA가 분류한 건축가의 업무 영역에 따라 건축설계, 도시설계, 실내설계, 구조설계를 담당하는 4개 분과위원회(후에 역사, 교육, 평론 등이 추가 되었지만)로 구성되어 있어 협회 활동의 주체가 되어왔다. 운영을 위한 부분은 ‘위원회’라 칭하고 건축가의 활동 영역에 따른 조직을 ‘분과위원회’로 구분했다.

 

“협회의 분과위원회는 UIA에 가입을 하면서, UIA의 본래 구성이 ‘프랙티스 아키텍트, 어번 디자이너, 인테리어 디자이너, 스트럭처 디자이너’, 네 가지가 기본 요소로 되어 있었으므로, 건축가협회가 UIA에 가입을 하려고 네 가지의 구성을 갖주었어요. ‘프랙티스 아키텍트’란 말을 우리말로 번역하기가 어려우니까, 그것을 ‘제작’이란 말을 써서 프랙티스 아키텍트 커미티가 제작분과위원회로 된 것이지요(윤승중).”

 

<건축가>지에서는 우선 1982년부터 도시 설계(도시계획분과위원회) 부분의 기사를 많이 다루게 되었다. 한편 <건축가>지는 그때까지 주로 건축물을 위주로 다루어 왔지만 사실 이미 대규모 아파트단지 올림픽 시설, 신시가지 개발 등 도시 문제가 대대적으로 이슈화되고 있었다. 각 위원회의 활동을 좀 활성화하고, 그런 건축가 전문 집단의 활동을 기록하여 회원간의 정보교환, 또 대 사회적 발언의 자리를 위한 것이었다. 더 많은 담론, 세미나, 작품으로 훨씬 풍부해졌다.

 

1988년에는 도서 발간을 별도 수익 사업으로 하기 위해서 ‘편집위원회’에서 ‘편찬분과위원회’로 명칭을 바꾸게 되는데, 여전히 재정 문제는 쉽게 풀리지 않는 것이었다. <건축가>지의 잡지 광고나 도서 발간 사업을 통해 생기는 이익을 특별 회계로 해서 적어도 <협회지> 자립할 수 있도록 하려 했으나, 실현되기 어려운 점이 있었다. 한편 0000년 <한국현대건축총람>이 출간되는데, 이 때 상당한 자료를<건축가>지가 제공하게 된다.

 

한국현대건축총람과 <건축가>

 

“개항 100년, 모든 게 100년에 맞춰져 있었다. 건축계에서 개항 후에 근대 건축사의 정리가 필요했던 것인데, 그 당시 황일인 편찬위원장이 기획했던 내용을 보니까 어마어마한 걸 만들려고 했었어요. 21세기를 맞이하는 시점에서 건축 전체에 관한 이론적인 접근을 하려고 하는데, 그러지 말고 객관적인 기록, 색깔이 전혀 없는 자료로서 만드는 것도 의미가 있다고 어드바이스해서 내용을 조정했어요. 한국건축가협회가 이데올로기, 건축이론 같은 것을 주장할 순 없다고 생각했거든요(윤승중).”

 

“1982년부터 85년까지 4년간 편집 일을 보았는데 1990년 윤도근 회장께서 저에게 평론분과위원회를 맡기시면서, 소위 개항 후 100년(1876~1990)의 한국건축 정리 작업을 해달라고 부탁하셧는데, 당시 편찬위원회가 <건축가>지 편집에 바쁘니까 ‘평론분과위원회’를 태스크 포스로 생각하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완벽한 객관적 기술이란 것이 참 어려운 일로, 어떤 이슈를 선택 하느냐는 것 자체도 일종의 평가였어요. 그러나 사실만 기록하고 평가는 별도 기회를 보기로 하며 최대한 객관적인 자료집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이때도 자료의 정확성을 높이기 위해 원로건축가 몇 분과 여러 차례 대담을 가졌고, 책이 출판되는 데 5년이 걸렸어요. 오랜 기간 동안 헌신적으로 봉사해준 총람편찬위원들과 그의 대가 없이 원고를 집필해주신 많은 분들께 지금도 감사하게 생각합니다(황일인).”

 

“자료 수집하고 서로 맞추고 확인하는 일을 상당히 오랫동안 했기 때문에 시간이 많이 걸렸거든요. 재미있는 것은 윤도근 선생이 처음 발의해서 책이 나올 줄 알고 발간사를 쓰셨다가, 1,2년 지나고 다시 책이 나올 것이라 보고 장석웅 회장이 또 발간사를 쓰셨어요. 세 번째로 제가 마지막 발간사를 썼어요(윤승중).”

 

무엇보다 <현대건축총람>을 만들어 내는 데 <건축가>지가 중요한 자료가 되었고, 상당히 많은 도움을 주게 된다. 당시 한국의 건축 역사를 기록으로 남길 수 있는 자료들이 그렇게 많지 않았다는 것을 보면, 1980년대 <건축가>는 충실한 기록, 역시 총람으로 이어지는 배경이 되었다 할 수 있을 것이다. –“1990년까지는 <현대건축총람>으로 정리를 하고, 그 이후에는 10년 단위로 역사를 정리해 나가면 간단하지 않을까, 싶었지요. 잡지도 많고 자료가 풍부하니까 가능하리라고 생각했는데 그 일이 이어지지 않는 것 같아 아쉽지요(황일인).”

 

<건축가> 100호 발간과 월간지 전환

 

저는 1989년 (김정철 회장) 편찬위원장을 1년 정도 더 했어요. 당시 조성룡 이사가 부위원장이었는데 헌신적으로, 모든 것을 다 열심히 해 주어서 많은 도움을 받았던 기억이 납니다. ‘한국건축가협회 상’을 1978년에 발의해서 1979년부터 시작했으니까 1989년이면 10년이 되던 해여서, 제안한 한 가지 아이디어는 수상한 건축물을 10년이 지난 뒤에 실제로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리뷰를 해 보자는 것이었어요. 매년 가장 이슈가 됐던 것을 하나씩 골라서 방문을 했는데, 그 첫 번째 대상이 마산성당이었고, 그 당시 김정신 교수가 위원이었는데 성당 건축의 전문가이기도 하셨다. 건물이 지어질 당시에는 신부님과 김수근 선생이 상당한 교감이 있었는데, 그 사이 신부님이 바뀌고 이해가 없고 굉장히 불편하다고 불평하셨는데, 그래서 한 번에 끝나고 말았어요. 외국의 좋은 건물을 가보면 꽤 오랜 시간이 지나도 가치를 지니고 있고, 사는 사람들도 프라이드를 가지고 있지요. 그에 비하면 우리나라는 시간이 지나면서 새로운 시대에 잘 적응을 못해서 헐리고 수명이 짧은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그 기획이 계속 이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는데, 지금이라도 그런 것을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윤승중).”

 

그리고 <건축가> 1990년 11월에 100호 발간을 계기로,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권명광 교수의 디자인으로 표지 디자인을 새롭게 바꾸고 월간으로 발행이 된다. 또한 1992년부터 <건축가>지의 컬럼을 통해 건축가협회의 이슈들을 전달하는데, 사설과도 같은 역할을 한다. 몇 가지를 보면 한국건축가협회에서 만들게 되는 한국건축정보센터, UIA 시카고 건축환경선언과 준비에 대한 필요성, 또 우루과이 라운드에 대한 대비 등에 대한 주장을 담는다. 상당히 빠른 속도로 진행되는 외부 상황에 맞춰 <건축가>지도 월간으로 전환하게 된다. <건축가>지의 월간 발행은, <건축가>지가 비로소 작품, 연구활동의 기록은 물론 대사회적인 발언, 건축계 이슈가 되는 제 문제점들의 분석 등이 폭넓게 게재되는 명실공히 건축계 전문지로서의 자리매김을 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윤도근 회장이셨을 때 몇 가지 획기적인 일은 <건축가>지를 월간으로 바꾸었는데, 1990년 11월호부터 월간으로 발행을 했어요. 통권 100호부터인데, 그때부터 한 10년간이 <건축가>지의 전성기가 아니었나 생각이 돼요. 체제도 갖춰지고, 그때는 사진 기자와 편집 전문스텝들도 있어서, 박영건 편찬위원장님이었을 때는 해피한 시절이 아니었을까 하죠(웃음)(윤승중).“

 

건축평론 전성기와 IMF시대의 <건축가>

 

“제가 1996년부터 위원장을 두 번 했는데, 원래는 김경수 교수님이 하시다, 임기를 못 마치고 영국을 가게 되셔서 보궐선거가 있었습니다. 그때 제가 지명이 되었어요. 갑자기 편찬위원장을 하게 되면서 당황스러웠는데, 그때 최동규 선생에게 부위원장 직을 부탁하면서 도움을 많이 받았던 기억이 납니다. 그때는 말씀대로 기자들도 있었어요. 두 번째 편찬위원장을 할 때는 1997년 말에 IMF가 문제를 야기하긴 하는데, 그 전까지 건축계에 젊은 건축가들이 많이 등장을 했다. 제법 일도 많았고 젊은 건축가들에게 기회가 많았습니다. 그런 분위기에 <건축가>지에서는 평론이라는 것을 하자고 해서 이강헌, 이종건, 이런 분들로 편찬위원들을 대폭 새롭게 구성했어요. IMF 이후에도 앞서 다져놓은 것들이 있어서 한 1년 동안 재정적으로 그렇게 힘들지는 않았던 거 같습니다. 그러면서 그때 ‘젊은 건축가’라는 새로운 코너도 만들고, 옛날 건물이지만 좋은 작품들은 소개를 했어요. 책이 좀 얇아지기는 했지만, 편찬위원회의 열기는 상당했어요. 젊은 건축가의 선정에서부터, 작품 선정도 제대로 하기 위해 투표를 하기도 했어요. 그때는 작품을 게재해달라는 청탁을 받을 정도로 경쟁도 치열했어요.(박영건).”

 

그러다 IMF와 경제적인 벽에 부딪히면서 <건축가>지는 발행을 중단하고 웹진으로 변경하게 된다. 특히 ‘99 건축 문화의 해’ 행사를 치루면서 협회의 모든 조직을 이 행사에 집중시키게 된다. 2000년부터 정보센터를 구축하게 된다. 문화유산들에부터 현대건축 및 건축가들에 대한 정보를 데이터베이스로 만들어, 국가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자원이라는 점이 설득되어 정보통신부로부터 자금을 지원받아, 발행되었던 <건축가>지와 웹진을 등록하고 2001년 2002년에는 연간 발행된 웹진을 모아 애뉴얼을 발행한다.

 

5. 1990년 8월호(통권 99호) 표지

6. 1990년 11월호(통권 100호) 표지

 

 

 





2천년대 <건축가>

2000년 7월호~ 2003년 11월 <건축가>지 발행 중단, 웹진 발행. 애뉴얼 <건축가>지 발행

2004년 5월호(통권200호) ~2005년 5/6월호 <건축가>지 격월간 발행 재개, 웹진과 병행

2005년 7월호~ 2006년 1/2월호 <건축가>지 월간 발행, 웹진과 병행

2006년 3월호~2006년 12월호 <건축가>지 월간 발행

2007년 1월호~현재 <건축가>지 격월간 발행

 

웹진과 <건축가>

 

2천년대 들어 큰 변화는 <건축가>는 종이 책 대신 웹진으로 발행하게 된다. 2000년 7월호부터 웹진을 발행하고 매년 연말에 발행된 웹진을 모아 애뉴얼을 출간한다. 그러다 다시 <건축가>와 웹진을 병행해서 발행하며(2004년 5월호부터), 2006년에 월간 형태로 <건축가>지만 발행하게 된다. 그러다 2007년부터 격월간 발행체제로 바뀌고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지난번 2007년도 <한국건축가가협회> 50년사를 만들면서, <건축가>의 역사를 썼습니다. <건축가>의 위상이나 활동을 다이어그램을 그려보자면 1960,70년에서는 완만하다가 1980년대 급상승하고, 1990년대 말이 되면 제각기 분리되는 형국인데요. 2천년대로 넘어오면서 특히 건축가협회로서 위상이 상대적으로 줄었다는 의미로 이해가 되면서, 한편으로는 컨텐츠는 그 어느 때보다 다양하고 풍부한 것 같습니다. 마치 알파부터 오메가까지 하고 싶은 얘기들이 다 들어있는 것 같은 거지요. 2천년대 들어오면 둔화되었다거나 선별된 작품에 크릭틱, 시리얼이 있는 특집이 생긴다든지, 그 전의 특집 기획과는 다른 양상인데, 폭이 좁아진 대신 깊이가 생기지 않았나 해요. 통괄적인 종합지의 면모이기보다는 전문지 같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오섬훈).

 

웹진으로 발행하던 것을 다시 <건축가> 출판을 변경하면서, 다시 예산 문제가 크게 부각된다. 무엇보다 웹진에 대한 실효성이 제기되고, <건축가>지를 왜 만드는지에 대한 원론적인 질문을 던지게 된다. 한국건축가협회지로서 역할과 건축잡지로서 역할을 생각한다면 협회에서 발행되는 잡지는 최소한 건강한 작품과 평론이 제대로 게재되지 않으면 안된다고 보고, 단순한 회원들의 마당이 되어서는 곤란하다라고 판단을 한다. 그래서 다시 협회지를 만들기로 하고 편집 방향을, 작품과 작품에 대한 비평, 가능성 있는 젊은 건축가들을 매회 한 명씩이라도 발굴, <건축가>를 통해 알릴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기로 하고, 회원 및 협회 활동 상황에 대한 정보 역할을 하도록 체제를 다시 갖춘다.

 

그 당시 편찬위원회는 최소한의 볼륨인 50페이지로 한정하기로 하고, 흑백 인쇄와 최소 부분만 컬러를 병행하기로 하여 이사회에서 승인을 받는다. 가장 저렴하면서 효과적인 방법을 고민하면서, 종이 재질, 책의 사이즈와 함께 내용에 대한 재점검을 하게 된다. 최소 페이지로 구성할 수 있는 내용으로 협회 소식, 작품 위주로 편집과 비평, 그 외에 행사 등으로 하여 <건축가>지의 기본 컨텐츠를 구성한다. 또한 현재 표지 디자인, 타이틀 등이 같이 결정되었다.

 

“제가 편찬위원장일 때가 굉장히 어려웠던 시기였는데, 종이 잡지가 웹진으로 바뀌던 시기였어요. 그 다음 해에는 건축가협회 상이 나올 때 연간 발행된 웹진들을 묶어 얇은 책이 하나 나왔다. 편찬위원장으로서도 좋지 않았던, 모멸감 혹은 곤혹스러운 시기에 제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잡지의 운영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그렇게 하지 않을 수도 없었지요. 웹진 자체는 돈이 들지 않으니 풍성하게 실릴 수 있었지만, 종이 매체가 주는 것이 분명히 있어요. 그 후에 개인적으로 <건축사>지 편찬위원장 했을 때도 그런 아쉬움을 해소하고 싶어서 했던 것도 같습니다(최동규).”

 

“잡지로 변환된 이후, 저도 위원장이 되었어요. 우경국 편찬위원장이 계실 때 지금의 포맷을 정한 것인데, 제가 임기이던 2005-2006년 당시를 기억하기론 컬러 12페이지를 역시 넘지 못하게 돼 있었어요. 그리고 어느 정도는 자체 예산을 조달되는 형식이었으면 좋겠다고 해서, 광고를 유치하는 것에 대한 얘기가 있었어요. 변용 회장님 임기 초기, 그 이전에는 설계분과위원회 외에 분과위원회의 활동이 미비했는데, 활동을 활성화하는 수단으로 전 분과위원회의 활동을 <건축가>에 싣기로 방침을 정했어요. 

그리고 우경국 위원장님때 실시한 설문조사인 <건축가>지 나아갈 방향에서도 평론에 대한 요청, 그리고 회장단의 의지였던 분과위원회의 활동 결과물을 유지하기로 했어요. 실제 10개 이상의 분과위원회 활동을 매호 싣기로 했지만 1-2개 분과위원회를 제외하고는 활동이 그렇게 많지는 않았어요. 시작할 때는 회장단의 의지가 강력해서 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그만큼 잘 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 당시 이슈가 되었던 건축물 설계 표현과 시스템의 표준화 연구와 위원회별 이슈, 평론을 세 축으로 해서 구성을 했고요. 두번째 연도는 연재물 경우 ‘도시 공공성’이란 큰 주제 하에 격월 소주제의 좌담회 내용을 싣다보니 압축과 농도가 짙어진 것 같습니다. 그게 여러 계기가 되었던 것 같다. 두번째 연도에서 예산에 대한 부담이 뒤따랐고, 결국 2007년부터는 격월간으로 다시 돌아갔습니다(오섬훈).”

 

1980년대 후반 1990년대 중반까지 <건축가>지가 기록 중심에서 작품 수록으로 중심이 옮겨지면서, 건축 작품들이 풍성하게 수록된다. 그러다 1990년대 후반부터 상업 잡지들이 대거 많이 등장하면서, 개개인의 작품들은 자제하기도 하는데, 평론을 활성화 하기도 한다.

 

“<건축가>지가 출범하는 회장단 마다 조금씩 달랐던 게 대개 집행부의 의지, 편찬위원의 의지, IMF나 경제적 여건, 회원들 요청 등, 네 가지 정도 변수에 따라 조금씩 달라진 것 같습니다. 한 때는 작품 수가 굉장히 많이 게재되었는데, 모든 회원들이 내기만 하면 거의 다 실린 경우였던 것 같습니다. 반면 주제 없는 평론이 일회적으로 이루어지다 보니 아쉬움이 따르는데, 주제나 문맥적으로 이루어지면 좋지 않았겠나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오섬훈).”

 

사회적 이슈에 대한 대응

 

현재 한국건축가협회의 각 분과별로 ‘재난의 건축’에 대한 관심과 활동은 <건축가>지에서도 포괄하고있다. 위급한 상황에 대처할 수 있는 건축, 당장 보급해야 하는 건축의 문제도 하나의 이슈가 되고 있다. 또한 올해는 <건축가>의 주요 이슈는 건축대전, 초대작가전의 주제와도 맥을 같이한다. ‘집’이라는 것에 포커스를 맞추고 있고, 아파트 구조에서 저항적인 새로운 변화의 가능성을 담고 있다. 이러한 이슈의 배경에는 사회적 관심과 그에 따른 새로운 돌파구의 모색으로 보이고 이러한 방향과 국토해양부, 문화체육관광부에서의 관심이 어느 정도 상호작용을 갖기도 한다.

 

“예를 들어 최근에 일반인들과 소통될 수 있었던 두 가지 사건이 있었다고 봅니다. 헤이리 아트밸리와파주출판단지가 건축계와 사회에 던진 큰 이슈이면서 사건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헤이리 작품집을 만들면서 느낀 것이, 그 책을 들고 헤이리 아트밸리에 오는 건축과 학생, 일반인들을 보면서입니다.건축을 알리는 방법은 일반인들도 참고할 수 있는 책을 만들면 효과가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죠. 그래서 건축하는 사람뿐만 아니라, 일반인, 해외 관광객, 혹은 집을 지으려고 오는 사람들 등, 소문을 듣고 문화체험, 또는 집 짓기 위해 한 번씩 둘러보는 곳이 되었거든요(우경국).”

 

대사회적인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에 헤이리나 파주, 근래 광주비엔날레도 있지만, 아쉬운 것은 국립중앙박물관과 같은 국가적 중요프로젝트의 현상설계 과정을 충분히 의식해서 알릴 수 잇는 방법이 있었으면 합니다. 국가적으로 중요한 프로젝트는 이슈를 만들어, 일반인들의 관심을 모은다면 건축적인 이벤트가 될 수 있다고 봅니다. 근래 노들섬이나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앞으로 서울역사 리모델링도 중요한 이슈가 될 수 있는 것이지요. 이벤트, 행사를 통해 일반인들이 관심을 가질 수 잇도록 하면, 기록으로 남아서 출판과 병행하기도 하고, 건축계에서도 자극을 줄 수 있는 촉매제가 되고, 일반인들이 건축가에 대한 인식도 확장될 것 같습니다(오섬훈).”

 

“만약에 협회에 힘이 좀 있다면, 주요한 건축적 사건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독일을 예로 들면, 1927년대 슈투트가르트의 바이젠호프 지들룽 주거단지계획, 30년 뒤에 베를린 집합주거단지, 다시 30년 후에 1987년 IBA 베를린 프로젝트, 루르 공업지대의 강변에 새로운 도시를 재생하는 IBA 앰셔 파크 프로젝트 두 가지가 동시에 일어났고, 얼마 전에 다시 새로운 이슈가 등장했다. 첫번째는 모더니즘 주거에 대한 실험이었고, 1950년대는 집합주거, 1980년대는 생태와 도시재생 문제를 갖고 본격적인 논의가 있었다. 대체로 30년이라고 하면 한 세대인데, 새로운 세대가 등장하면서 건축적인 큰 사건과 새로운 이슈들을 만들어내고 있다. 비견하자면 우리도 한국건축의 흐름에 따라서 큰 담론적 사건을 한국건축가협회에서 만들고, 정부 정책과 연계를 할 수 있다면 건축가의 위상뿐만 아니라 건축가협회의 위상도 달라지지 않을까 생각됩니다(우경국).”

 

“지난번 안영배 교수께서도 사회적 이슈에 대해서도 꼭 언급을 해야 한다고 하셨어요. 지금 사대강이 조심스러운 이슈인데, 노들섬과 같은 첨예한 분야가 나왔을 때, 관람자 입장이 아니라 건축가들도 쟁론을 함으로써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것을 스스로 해야 한다고 봅니다. 다소 먼 발치에서 소극적인 동향이 있다는 생각은 들어요. TV에서 관심 받는 드라마가 있다면 연이어 CF가 나오듯, 노들섬이든 사대강이든 건축에 관련된 이슈는, 즉시 만들어내는 순발력과 지략이 필요하지 않나 싶습니다. 이를 테면 오프라 윈프리의 토크쇼처럼 토크쇼가 필요할 것이고, 책 만들고 글을 내는 것 보다 소셜의 장을 통해 인맥과 영향력, 생각을 확장시키는 것이나, 미디어를 무기로 생각하는 것이죠. 이슈가 생길 때 바로 대응하는 것, 그것도 훈련이 되어야 가능하는 것이지만요(최동규).”

 

“사대강 사업이나 한강 르네상스를 대개 정치적인 이슈로 시작되는데, 정책 계발할 때 참여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본다. 실제로 사대강 개발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장기적인 마스터플랜에 따른다면, 그 주변의 수변도시도 개발하는 것도 백업이 되면 건축 전문가 집단들이 가협회나 사협회에서도 깊게 관여되어 뭔가 지속적이고 완성도 있는 아이디어가 형성될 수 있었을 것 같은데, 이러한 일련의 과정들이 체계적으로 돼 있지 않다는 점이에요. 지금 시장 후보들도 강남북 균형이니, 임대주택이니 하는 건축적 이슈를 들고 나오지만, 건축계 전문집단들의 자문을 받아서 나온 것인가, 하는 점이이죠. 그런 것들이 <건축가>지 와 매치를 해볼 수 있는 것이라면 사회적 이벤트들이 책을 통해서 만들어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오섬훈).”

 

건축가의 위상을 재정립

 

일반 건축잡지와는 달리 건축가협회지로서 <건축가>의 태동은 회원들의 알림의 장소로 시작했고, 결국은 작품이 드러나고 작가의 의지를 알리고, 제삼자에 의해 리뷰가 이루어지는 장으로서 <건축가>지가 수십 년간 유지가 되어 왔다.

 

특히 인터넷의 일반화와 특히 스마트폰이 등장 이후로, 엄청난 정보들이 쏟아져 나오는 매체 환경에서 <건축가>지의 역할은 더욱 중요할 것이다. 이슈를 찾아내고 계발, 정리하는 것이야말로 잡지 본연의 임무로 부각될 뿐만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문학적 배경이나 철학적 사상이나 미학이 파급 효과를 가질 수 있는 영향력이 있는데, 관심을 가질 수 있다면 건축잡지의 효과는 대단한 것이 되는 측면이 있다. 특히 사회적인 문제가 일어났을 때 전문가 집단의 능동적인 대처와 같이 지속적으로 요구 받는 것들에 대해 객관적인 자료로서, 전문성과 조직력을 갖고 대응할 필요성이 더욱 중요해지고, 전문가 집단의 위상으로도 연결되는 측면이 된다.

 

“결국 대사회적으로 위상을 올린다, 하는 방법들은 두 가지일 것 같습니다. 하나는 직접적으로 일반인들에게 정확히 전달하는 것인데, 외부의 인사를 포섭하는 방법이 있을 수 있고요. 다른 하나는 전문가들이 만든다는 전문지로서 위상을 올려놓는 것으로, 교류가 이루어지는 차원에서 내적으로 전문성이 확보되면 대사회적인 역할을 하는 가능성을 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사실은 <건축가>는 어디다 초점을 맞추어야 하는가, 인데, 둘 다 놓칠 수 없는 것일 겁니다. 이를테면 바깥으로 알리는 것은 컬럼이나 저명인사 초청을 통해 시도해본 적이 있고, 또 한편으로는 내적으로 튼실해지는 법은 책을 만드는 내용이나 분야들이 집중화되고 깊어지는 쪽으로 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반면 통섭의 관점을 놓칠수도 있으니 이것이 아마 숙제일 것 같습니다.

또한 건축의 문제를 이야기할 때 그 전단계인 기획 단계에 대한 접근도 필요하다고 봅니다. 근본적으로 건축 자체도 중요하지만, 건축설계 이전의 단계를 건드릴 수 있어야 하겠단 생각입니다. 예를 들면 저세빛둥둥 섬이 왜 저곳에 있어야 하는가 까지 손댈 수도 있을 것입니다. 건축의 정책입안 단계까지 갈 수 있도록 이슈로 만들고 잡지들이 그런 역할을 하면 좋을 거 같습니다(오섬훈).”

 

앞으로 <건축가>지를 통해 건축가들의 말하기라는 것은 이슈를 어디다 두는가에 따라 조금은 달라질 수 있겠다. 일반인들이 갖는 관심, 앞으로 국가적으로 진행되는 프로젝트들이 충분한 매개체가 될 수 있음에도, 정치적인 프레임에서 벌어지는 일드로만 전문가 그룹이 보고 있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좀더 적극적인 자세가 필요하며, 전문가 그룹이 제 역할을 못한다면 잡지도 마찬가지겠다. 놓은 예이지만 올해 바우하우스 잡지가 재탄생을 해서 60년만에 새로 나온다. 종이의 매력, 책의 매력이라는 게 어느 매체가 발달이 되더라도 향수는 무관하게 있다. 과거 바우하우스를 다시 만들겠다는 것은 의식의 르네상스와도 같은 것이며, <건축가>지도 그런 면모를 찾아야 되지 않겠는가, 한다.

 

ARCHITECT 9-10월호, 2011

 

 

포이동 266번지 재건마을에 들어선

장영철+김지호의 모바일 하우스

 


서울 포이동 266번지(개포4동 1267번지)는 지난 6월 화재 이후, 불법 거주지 명목으로 강제철거가 시도되면서 불거진 정착민들과 지자체의 갈등은, 한국이 안고 있는 주거 문제를 또 한 번 상징적으로 드러내었다. 이후 주민들의 마을 재건 노력과 결실은 점차 가시화 되고 있는데, 화재로 소실된 아이들의 공부방이 새롭게 들어서면서 그 중심이 되고 있다.


일명 ‘움직이는 공부방’은 언제 어디서나 설치와 철거가 가능한 모바일 하우스다. 플라베니아 소재로 가볍고, 접이식 구조로 펼쳤다 접었다 할 수 있다. 모바일 하우스는 2겹 구조로 되어 있으며, 외피는 빛을 반시하고 내피는 빛을 통과시키도록 고안되었다. 3×3×3m 공간을 기본 모듈로 한 채가 구성되며, 공부방은 2채를 이어 만들어졌다. 이 모바일 하우스는 장영철(와이즈건축)+김지호 씨의 건축적 발상으로, 시도하기 전에 가장 먼저 한 것은 아이들과의 워크숍이다. 아이들이 쓸 공간에 아이들의 생각을 담는다는 취지에서 종이 접기, 모형 만들기, 목업 과정으로 워크숍이 이루어졌으며, 공부방을 짓는 과정 역시 아이들과 주민들의 참여로 이루어졌다.  공부방의 건축 소재로 가볍고 쉽게 접히는 플라베니아를 선택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그들은 이번 포이동 모바일 하우스의 다음과 같이 전한다. “이 모바일 공부방은 이러한 모순된 상황에 처해있는 주민들의 처지에 대한, 일종의 항변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은 현재 주민분들은 역설적으로 이렇게 '모바일' 형식의 공간이 현재 포이동 266번지의 기본적 주거 권리를 만족시킬 수 있는 구조물일수 있을 것입니다.”


한편 장영철 씨는 문화체육관광부 주최의 2011년 ‘젊은 건축가 상’ 수상자이다.

 

 

 

<ARCHITECT>  2011 9/10월호 vol.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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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ril 18, 2011 12:12 PM

Architecture firms' latest design is for growth

Five largest firms ranked by Crain's all added employees last year; Kohn Pedersen Fox tops list, followed by Perkins Eastman and Gensler. 

By Marine Cole 

 

With developers once again daring to make plans for new projects, many of New York's biggest architecture firms are hiring again, according to Crain's New York Business' latest ranking of New York's largest architecture firms.

Out of the city's 20 largest firms, 12 added architects during 2010, while only four cut their staff of architects. Hiring has been across the board, from entry-level posts all the way up to the most experienced.

“We're seeing a growth in activity in North America, in particular on the East Coast,” said Paul Katz, managing principal at Kohn Pedersen Fox Associates, which was ranked as the largest architecture firm by staff count in the New York area with 163 licensed architects in 2010, up from 154 architects in 2009.

Kohn Pedersen Fox has been working on the Hudson Yards project on Manhattan's West Side, which is being developed by The Related Cos. The firm is also working on redeveloping Goldman Sachs' Embassy Suites in lower Manhattan.

“New York started coming out of the recession earlier than the rest of the country, and business is improving, but it's still uneven,” said Bradford Perkins, chairman and chief executive of Perkins Eastman, which is the second largest architecture firm in the city, employing 158 licensed architects in 2010, up from 127 in 2009. The firm was listed in third position the previous year. Mr. Perkins noted, for example, that firms focusing on residential projects are still struggling as few residential buildings are being built.

In contrast, work at Perkins Eastman is starting to come back, especially at some of its largest institutional clients—including major medical centers, which represent more than 50% of the firm's work. Perkins Eastman started designing a new hospital for Memorial Sloan-Kettering in January. Mr. Perkins noted that the firm also specializes in retirement communities, a practice that has become busy again. It additionally received a number of large school projects both in the U.S. and overseas.

Ranking third on the Crain's list is Gensler, which slipped from its second place perch in 2009. It is followed by HOK and Skidmore Owings & Merrill. All of the Top 5 firms boast over 100 architects; all were also hiring in 2010.

Most New York architecture firms tried to weather the recession by expanding internationally. Most are continuing to focus a great deal of their attention overseas, especially in China and India.

“For large firms, our practice by necessity is becoming global,” said Mr. Perkins, adding that roughly a third of his firm's practice is overseas. “The percentage of work overseas has gone up sharply during the recession.”

This is true at Kohn Pedersen Fox, too, where a little more than half of the firm's work is focused internationally. “We've always been working overseas but more so during the recession,” Mr. Katz said.



최-페레이라 건축의 작업은 개별 프로젝트가 처한 도시, 경제, 사회적 맥락들에서 모티브를 얻는다. 실험실에서 여러 인자와 재료들을 가지고 실험하듯 작업을 진행한다. 그들은 건축을 만들어내는 마술과 같은, 또는 기계와 같은 시스템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결과적으로 그들이 갖고 있는 건축의 이상이나 개념들도 프로젝트가 처해 있는 물리적 현실과 함께 하게 되며, 개별 프로젝트마다 어느 시점에 재료와 공간이 바뀌면 개념과 건축적 이상도 수정한다. 그래서 그들이 그들의 건축과 갖는 관계는 매우 개인적이며 개별적이다. 그들이 작업하는 방식은 마치 19세기까지의 장인들과도 닮아있다 볼 수 있으며, 그들이 생각하는 건축가의 역할은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 늘 그래왔듯이, 아름답고 의미 있는 공간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2005년 최-페레이라 건축은 최성희와 로랑 페레이라가 함께, 2005년 서울 공연예술센터 국제 아이디어 설계경기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하며 주목 받기 시작하였다. 첫 주택설계 작품 GODZILLA로 2009 서울시 건축상, 2009 한국건축가협회 엄덕문 상을 수상하였고, 2010 하버드 대학 한국건축 특별기획전에 참여했다. 최성희는 연세대학교 주거환경학과와 프랑스 파리 라 빌레트 국립건축대학을 졸업하였다. 로랑 페레이라는 생 뤽 건축 대학 졸업 후, 아뜰리에 쟝 누벨, 한양대 초빙 교수를 거쳐, 현재 숭실대 건축학과 교수이다.


디림(D•LIM; Design & Life in Mind) 건축에게 건축 철학은 섣불리 말하기 조심스럽고 앞으로의 가능성으로 남겨두는 부분이다. 어떤 생각을 갖고 작업에 표현해야 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그리고 그들은 철학이라는 것 대신에 도시와 건축이 지나친 장식과 쉽게 빨리 변하는 트렌드를 좇는 것이나 건축물의 지속성에 대해 생각지 않는 것에 대한 반감과 문제 의식을 갖는다. 또한 건축이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에 대한 책임감 같은 것들을 견지한다. 그리고 그것을 건축가가 줄 수 있는 건축의 메시지로도 설명한다. 그들에게 건축적 메시지는 건축이 오래 남아 있도록 해주는 것이며, 건축가 스스로가 느끼는 자부심과도 같은 것이다.

그들이 말하는 건축적 메시지는 늘 두 가지 시선을 유지하면서 만들어진다. 지속 가능성과 지속 불가능성, 기술과 반기술, 투박함과 세련됨, 지역성과 보편성 같은 것들에 이중적이고 모순된 물음이 두 가지 시선이라 할 수 있다. 그들의 안중근 기념관에서는 화려하면서도 비슷하게 드러나는 현상 설계의 패턴이나 건축의 보편적인 기능이 하나의 시선이고, 상징적인 이미지와 형태로 구현되는 건축적 아이디어가 또 하나의 시선이다. 칼날의 양면 같은 두 시선은 작업 단계마다 전방위적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작은 도서관에서는 하나의 일관된 시나리오로 유지되기도 한다.

그들은 운이 좋아 현상 설계에 당선된 프로젝트가 첫 작업이 되었고 건축상까지 수상하게 되었다고 한다. 아직은 완성되지 않은 상황에서 틀 안에 스스로 가둬놓고 싶지 않기 때문에, 건축가의 메시지가 약한 현상 설계 작업도 의미 있는 것으로 둔다. 그리고 그들이 꾸준한 관심사는 친환경과 지속 가능성에 대한 이슈들이다. 현재 에너지 절약에 집중돼 있는 이슈를 계획 단계에서 코웍으로 풀어내는 시스템을 만들어내는 것이 앞으로 그들의 과제이며, 연구 주제다. 어쩌면 자연이나 친환경, 그리고 지속 가능성은 건축이 갖고 있는 근본적인 가치와 인간의 삶이 누려야 하는 당연한 가치들로도 보인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이 가치를 지속 가능성이라는 논리로 풀어내고, 설계 단계에서 통합적으로 접근하는 시스템을 고민하고 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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