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의 두 가지 도시 건축의 사건이자 이벤트는 역사 도시 서울의 모습을 그려 낸다. 하나는 임진왜란 이전 시기의 유구가 발굴된 종로구 당주동 현장에서이고, 또 하나는 청계천 문화관에서 열리는 <이방인의 순간 포착, 1930경성>전에서이다. 둘 다 한양과 경성, 그리고 서울이라는 같은 도시의 구조와 도시 조직을 이해하는 객관적인 근거를 보여 주고는 있지만, 팩트를 구성하는 구조가 말하는 속내는 달라 보인다. 역사 도시 서울의 도시 구조를 제대로 읽기 위한 방법론을 찾아본다. 글 | 강권정예(본지 객원기자), 자료제공 | 서울역사박물관, 한양대학교 건축학부 도미이 마사노리 연구실


 

조선시대의 서울, 16세기 한양

 

종로구 당주동 일대에서 발굴된 유구는 현재 도로 레벨에서 3m 아래에 있어 임진왜란 이전인 15세기 말, 16세기의 것으로 밝혀졌다. 유구를 통해 볼 수 있는 공간 배치는 주거의 유형이지만, 일반적인 민가의 모습과는 차이가 있다. 같은 현장에서 최근 총통이 발견돼 그곳이 육조 거리의 일부로 관사가 있던 자리라는 것을 추측하게 한다. 놀라운 것은 현장에서 유구를 통해 땅 속에 숨어 있던 조선 시대의 골목길이 현재에 드러나 있는 길과 그대로 일치한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땅의 모습이나 필지의 형상이 당주동 일대 건물들을 허물기 전의 모습과 많이 유사하다. 현장에서 채집된 토양 샘플은 늪 지대에서 발견되는 것으로, 지층 또한 하천이 퇴적된 모습을 하고 있다.

이러한 모습은 앞서 발굴된 종로2가의 르미에르 빌딩 자리와 현 종로구청 앞까지 이어진다. 그리고 당주동 발굴 현장의 터에 면해 있는 길(현대화재해상 본사의 뒷길)은 조선시대 도성대지도에서 청계천으로 흘러 들어가는 물길로 표시돼 있던 곳으로, 이 일대가 늪이었다는 것을 증명해 주고 있다.


16세기 유구가 발굴된 종로구 당주동 현장


 

현재 사대문안 서울 도심에서 발굴되는 유구는 조선 시대의 것들이 거의 많으며, 고려 시대 유적은 오히려 북악산, 인왕산 근처, 서촌 일대, 북촌 일대가 오히려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건축고고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그리고 지금 발굴되는 것들을 통해 도시 구조나 처음 도성을 건설했을 때 형태나 건물의 배치들이 그대로 남아 있다. 발굴 현장 자료를 통해 상상해 보는 것이 가능하다. 그리고 도시재개발이나 정비 사업들이 부분적으로 진행되고 있고, 아직까지 많은 발굴이 있지는 않지만, 도시를 이루는 구조나 큰 틀의 축은 바뀌지 않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 구조가 일제강점기 초반까지 그대로 이어지는데, 흥미로운 것은 일제강점기 때 제작된 지적도를 통해 이 같은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1914년 서울 도성 안에서는 최초로 지적 측량이 이루어지는데, 당시의 도시 구조는 일제가 손을 댄 모습이 아니라, 한양, 구한말 시대의 모습을 그대로 담고 있다. 도로 폭에서 조금씩 차이가 나지만 거의 유사하고, 중요한 도시 축들 역시 거의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현재 서울시와 종로구에서는 <서울 사대문안 보존 계획안>이 마련 중이다. 이후 법적 근거를 갖게 됨에 따라, 서울 사대문 안 도심 지역은 이와 같은 발굴 현장이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전문가들은 현재 개발이 진행되지 않은 종로3가와 청계1, 2, 3, 4가까지, 청계천을 중심으로 좌우로 1km 이상은 다 유구가 깊게 묻혀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그에 따라 도시 건축 연구에서 객관적인 자료와 서울의 변화 과정을 읽는 중요한 연구 주제가 될 것으로 전망된다.

 

일제강점기의 서울, 1930년대 경성


한편으로 당주동 현장에서 5km 떨어진 청계9가에서는 일제강점기의 서울인 1930년대 경성을 동시에 보여준다. 청계천 문화관에서 열리고 있는 <이방인의 순간 포착 1930경성>은 1930년대 가로를 복원하였다는 것과 경성을 보여 주는 첫 전시라는 점에서 이미 많은 신문, 방송에서는 그 의미를 전하였다.

복원된 가로 도면은 종로와 혼마치(本町, 지금의 명동과 충무로)로 당시 실측된 거리의 폭, 길이를 비롯해 노면의 구배 특성, 그리고 3천여 개에 이르는 상가의 이름과 주인, 상가의 품목, 운영 시간 등이 상세하게 기록돼 있다. 그리고 가로를 복원하기 위해 근거 자료로, 당시 조선총독부에서 발간한 지도 자료와 경성상공회의소에서 발간하는 경제월보, 상공인 명부를 바탕으로 하였으며, 특히 혼마치는 당시 그 지역에 거주했던 일본인들(혼마치 지역의 초등학교 졸업생)을 직접 인터뷰하고 사실을 확인한 것으로, 일제시기 도시 건축을 이해하는 기초 자료로서 가치가 한층 더해졌음을 알 수 있다.

전시 내용의 따르면 종로는 양측 직선형으로 2,943m로 인도와 차도가 분리되어 도로의 양측에 모두 보도 설치, 보도 안쪽은 차도, 그 중앙에는 복선 전차가 다녔다. 보도의 폭은 4~5.5m으로 아스팔트 마감 포장되었으며, 차도의 폭은 18.1~18.3m 아스팔트 콘크리트 포장, 또는 아스팔트 마감 포장이 있었다. 혼마치는 다소 굴곡 및 언덕이 있지만 대체적으로 평탄한 1,744m의 거리다. 도로 폭은 3.8~6m 인도 차도의 구별이 없었다. 허가 받은 자 이외에 자동차 및 자전거(단 인력거를 제외) 등이 통과할 수는 없었다.

종로와 혼마치의 가로 도면을 기획 제작한 도미이 마사노리(富井正憲, 한양대 건축학부 교수)는 전시 배경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전한다. “서울의 역사를 600년이라고 하면, 5백년은 조선의 한양 시대, 36년은 일제 경성 시대, 그리고 해방 이후 현대까지 특성이 있다. 그리고 서울의 컨텍스트를 볼 때는 이 세 장의 레이어를 생각하면 될 것 같다. 지금의 이 모습이 언제부터 비롯된 것인지, 보는 게 중요한 것 같다. 그 때문에 이런 전시가 필요하다. 그리고 경성의 1930년대는 가장 화려했던 시절이라고 생각한다. 관광이나 여행이 많았고 백화점 문화가 발전한 시대이고 박람회가 개최되던 시대이다. 그 시대의 문화들을 보여 주고 싶었다. 경성은 1910년부터 도시 구조를 만들기 시작하였는데, 1920년대 대표적인 건축물인 조선총독부, 경성부청, 또 하나가 남산 조선신궁이 도시적으로 중요하다. 철도가 놓이기도 했다. 그 당시 일본인들도 여기가 우리나라다, 라고 생각했을 것이고, 그 이후 도시 생활이 어떻게 발전했는가 하는가를 보여 준다. 문학이나 영화에서도 1930년대 도시 생활의 모습이 묘사되고 있는데, 도시 건축적으로 근거 자료가 되었으면 한다.”

 


1920년 경성유람안내도


1924년 경성시가지도


 

 

1929년 요시다 하츠사부로의 조선박람회 그림





같은 곳을 보는 다른 시선


그런데 전시를 통해 드러나는 몇 가지 의문 점은 경성의 모습을 보여 주기 위해 선택된 두 거리, 즉 종로와 혼마치가 경성의 대표적인 거리인가, 라는 것과 이 두 거리가 비교 대상이 될 만큼의 도시적 특성이 있는가 하는 점이다. 일제강점기 때 종로는 조선인 상권의 전통적인 거리이자 비즈니스 중심 거리이고, 혼마치는 소비 상업 거리로 이 둘은 전혀 다르다 할 수 있다. 오히려 1930년대의 도시 구조를 제대로 읽기 위해 종로와 혼마치보다는, 지금의 소공로와 태평로가 중심이라고 할 수 있다. 세종로에서 이어져 나뉘는 두 거리는 당시 비즈니스 중심이고, 식민 자본주의의 심장부라고 할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이 두 거리가 비교 대상이 되는 것은, 그곳을 활보하던 깡패의 상징인 하야시와 김두환에서 비롯된다. 희화화된 이미지에 의해 두 거리가 비교되는 것은 근대 도시 건축에 대한 왜곡의 여지가 있다. 또한 전시의 이해를 돕는다는 측면에서 구성된 여러 사진과 영상물은 종로와 혼마치의 가로 복원이 단순히 객관적인 자료를 제공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그것들이 전시의 메시지를 만드는 프레임과 앵글을 구성하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것이 요시다 하츠사부로(吉田初三)의 그림과 영화감독 시미즈 히로시(淸水宏)의 영상물이다. 요시다의 그림은 1929년 조선박람회에 맞춰 제작된 것으로, 조선 관광을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게 할 목적으로 조선총독부에서 제작한 것들이다. 시미즈 히로시의 <1930경성> 역시 식민 자본주의가 최고조에 이른 시대에 조선총독부 철도국에서 제작한 것으로 총독부의 치적과 식민 통치의 정당성을 보여 주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요시다의 그림을 좀더 자세히 들여다 보면 경성의 모습을 조감법으로 묘사하고 있으며, 한반도를 중심에 두고 일본과 상하이를 연결하고 있다. ‘경성백경’ 역시 일제강점기 관광지 엽서로, 식민지로 여행을 여행을 오게 할 만큼의 매력이 있는 일본인들의 치적이 담겨 있다.

도시 건축의 모습이라기 보다는, 정치적 시선으로 재현된 사진들과 식민지 통치자의 프로파간다를 충실히 이행하는 영상물은 식민 도시 경성의 이미지로 드러낸다. 실측과 조사를 바탕으로 한 가로 도면들은 사진과 영상물을 진실로 믿게 하는 문자와 같은 힘을 발휘한다. 그리고 종로를 혼마치에 비교하는 방식은 경성이라는 도시를 지극히 타자화, 대상화시키는 것으로 일제강점기 도시 서울을 읽기에는 거리를 두고 봐야 할 지점이 분명 있다.

그리고 바로 이 점이 <이방인의 순간 포착 1930경성>전을 주의 깊게 봐야 하는 이유다. “이러한 영상을 비롯한 사진은 문화의 일부로 현실을 그대로 반영하는 도큐멘트로서의 의미를 넘어선다. 사진은 과거에 실재했던 어떠한 사건이나 현상을 그대로 재현한 것일 뿐 사실 그 자체라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사진의 지시적 기능을 주목하기 보다는 그것이 무엇을 재현하고 있으며, 그러한 이미지가 만들어진 사회 문화적 배경은 어떠했고, 이미지를 생산하고 소비한 주체는 누구인지에 의문을 품어야 한다” (권혁희, 재현의 정치학으로 보는 사진엽서 pp.103~105 요약발췌)

 

 


경성 전경(위)과 조선 명소로 소개된 경성의 중심가(웅장한 서양식 건물은 우체국, 조선은행, 철도호텔, 경성일보사)
'크다'가 아니라 일본과 천황 앞에나 붙이는 '다이나루(웅장하다, 위대하다)'라는 표현을 써, 조선식 건물과 차이를 강조한다.




서울 읽기


그리고 안창모(경기대학교 건축대학원 교수)의 언급으로 근대 시기 서울의 도시 건축을 읽는 관점에 대해 이야기를 대신한다. “흔히 말하는 근대라는 것은 도시를 무대로 펼쳐지는, 이전과는 구분되는 전혀 새로운 세상이다. 보통 도시를 무대로 펼쳐지는 근대 세계는 서양으로 치면 산업혁명을 통해 바뀐 새로운 생산 시스템에 의해 도시가 바뀌기 때문이다. 산업혁명의 공업화를 통해 대량 생산을 이루고, 그를 소비하는 도시가 태어난다. 도시는 유통망을 통해 새로운 자본을 형성하고, 이전에는 없던 새로운 건축 유형이 등장한다. 공업화 과정을 통해 공장 건축이, 도시화에 따르는 유통 시스템이 구축되면서 대규모 상가와 백화점, 그리고 자본화로 보험회사가 생기는 것이다. 하지만 서양의 도시를 보는 관점으로 한국의 도시를 보는 것이 적합하지 않은 부분이 있다. 우리나라는 산업혁명 없이 근대 사회로 접어들었고, 그것이 식민지화와 함께였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근대기에 변화하는 서양의 도시와는 다른 것이 다. 서양 도시를 배운 것으로 한국 도시를 보면 잘못 읽는 것이고, 그러면 잘못된 해법을 내놓게 되는 것이다.”

 
<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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