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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 신축-역세권-풀옵션이 아닌 ‘라이프스타일을’ 중개하는 부동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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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12. 4. 한국일보 : 

 

신축-역세권-풀옵션이 아닌 ‘라이프스타일을’ 중개하는 부동산

 

 

황수현 기자 

http://hankookilbo.com/v/058d0293e0564fff8ce5cecebc263442 

 

 

 

 

 

‘도쿄 R부동산’ 이야기 책으로

획일적 조건 광고보다 맞춤 중개

“최악 매물이 누군가에겐 최고”

 

 

쇠락한 지역 되살리기에도 관심

폐건물 ‘갤러리 르네상스’로 포장

공방, 출판사 줄이어 거리 살아나

 

 

 

# 도쿄R부동산이 중개한 일본 도쿄 시부야구에 있는 S씨의 집. 방과 거실의 구분 없이 149.15㎡(45평 가량) 공간이 통으로 뚫려 있다. 공간이 주는 제약을 싫어하는 S씨에게 안성맞춤인 집이다. 이케다 마사노리 제공

 

 

 

“어차피 거기서 거기. 차라리 뼈대만 있는 박스를 팔란 말이다!”

 

 

일본 도쿄에 사는 S씨는 한 부동산 중개 사이트의 광고문구를 보고 눈이 확 뜨였다. 집을 사려고 여기저기 발품을 팔았으나 구조, 화장실, 하다 못해 문손잡이까지 마음에 안 들어 매입을 포기하려던 참이었다. ‘차라리 건물 뼈대를 팔지’란 그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149.15㎡(약 45평) 짜리 뼈대를 매물로 내놓은 이 부동산 업체의 이름은 ‘도쿄R부동산(R부동산)’이다.

 

건축가인 바바 마사타카가 대표로 있는 R부동산은 ‘부동산을 발굴하는 새로운 가치 기준 세우기’를 표방하며 2003년 출발했다. ‘신축, 역세권, 로얄층, 풀옵션’을 내세우는 여느 업체들과 달리 R부동산은 주로 낡고 특이한 건물을 취급한다. 누군가에겐 최악의 매물이 다른 이에겐 최고의 매물이 될 수 있다는 게 이들의 믿음이다. 도쿄도 시부야구에 있는 S씨의 집을 소개할 때 R부동산이 쓴 광고문구는 “노출의 가능성”이었다.

 

“인테리어가 되어 있는 기존 아파트를 수리할 때는 신경 쓰이는 부분이 더 많다. 원래 공간 구획이나 설비의 위치 따위를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물건은 ‘있는 그대로 놔두면 되는’ 상태였다. 또 ‘이렇게 해야 한다’는 제약도 없었다.”

 

S씨는 집이 허락하는 자유를 흔쾌히 받아들여 주방, 거실, 방이 하나로 된 집을 만들었다. 어디서도 볼 수 없는 초대형 원룸이 탄생한 것이다.

 

 

# 일본 지바현의 한 연립주택. 5분 거리에 해변이 있어 서핑 마니아들을 겨냥해 ‘파도타기 연립주택’이란 문구로 광고했다. 이케다 마사노리 제공

 

# 도쿄 지요다구 바닥면적 16㎡(약 4.8평) 미만의 초미니 빌딩. 건물주 부부는 처음 빌딩을 보고 한 말은 “귀엽기도 해라”였다. 이케다 마사노리 제공.

 

 

R부동산이 창립 7년째가 되는 2010년, 지금까지의 중개사례를 모은 책 ‘당신의 라이프 스타일을 중개합니다’(정예씨)를 펴냈다. 책에 나열된 흥미로운 사례들은 공간을 보는 새로운 시각과 더불어 최근 한국사회가 골몰하는 도시재생에 관한 아이디어,나아가 부동산의 사회적 역할까지 다시 묻는다.

 

도쿄도 시부야구에 있는 디자인회사 ‘U-MA’ 사옥은 지은 지 40년 된 2층짜리 단독주택이었다. 고쳐 쓸 생각으로 건물을 매입했던 건물주는 갑자기 타지로 발령이 나자 급히 R부동산에 연락했다. “일반적인 시각으로는 값을 매기기가 어려운 물건이라,다른 부동산에 가 봤자 임차인을 구하기 어려울 거라고 예상했어요. 그래서 R부동산에 맡겼죠. 이 물건의 잠재력을 알아봐 줄 세입자를 구해주리라 믿었으니까요.”

 

R부동산은 파격적으로 낮은 임대료를 매긴 뒤 ‘대폭 수리 필요’라는 문구로 광고를 내걸었다. 수리에 자신 있는 사람들이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고, 그 중 가장 좋은 리모델링안을 내놓은 U-MA가 세입자로 ‘당첨’됐다. 2층 바닥 일부를 제거해 1,2층을 관통시키는 과감한 리모델링이었지만 건물주는 나중에 재임대할 때 가치상승 효과를 볼 수 있다며 오히려 좋아했다. 임대인과 임차인 사이에 원상복구를 둘러싸고 일어나는 기싸움, 거기서 비롯된 각종 비용 낭비까지 말끔히 해결된 것이다.

 

 

# 도쿄 시부야구에 있는 디자인회사 U-MA의 사옥. 40년 된 주택의 1,2층을 뚫는 파격적인 리모델링을 통해 모던한 사옥으로 변신했다. 이케다 마사노리 제공

 

# 도쿄 시나가와구의 1930년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옛 가옥. 낡은 집을 찾던 N씨가 매입해 2년 간 수리해서 거주하고 있다. 이케다 마사노리 제공

 

 

 

R부동산의 활동은 개별 중개를 넘어 쇠락한 지역에 생기를 불어 넣는 데까지 뻗어나가고 있다. 신주쿠, 하라주쿠 등 번화가가 몰린 도쿄 서부와 달리 동부지역은 2007년까지만 해도 도심 공동화 현상으로 골치를 앓고 있었다. 1962년 동부지역 지요다구에 지어진 아가타 다케자와 빌딩도 마찬가지. 유령건물이나 다름없던 이곳을 살리기위해 R부동산은 ‘갤러리 르네상스’라는 문구로 광고를 냈다. 사고방식이 독특한 이들이 모여 영향을 주고받다 보면 쇠락한 지역도 살아날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한 건의문의도 없어 지쳐가던 차에 돌연 갤러리를 내고 싶다는 사람이 나타났고, 이후 순풍에 돛 단 듯 출판사, 갤러리, 건축사무소, 주얼리 공방, 부티크가 줄줄이 계약을 마쳤다. 유령건물에서 문화집결지로 변신한 건물은 주변에 디자인 사무소와 예쁜 카페들을 끌어 들였고 이 일대엔 ‘아트 이스트(art east)’란 새 별칭이 생겼다.

 

도쿄에서 시작된 R부동산은 현재 가나자와, 후쿠오카, 보소, 야마가타 등 여러 지역으로 퍼져나갔다. 40명 남짓한 R부동산 멤버들은 매일 각 지역의 원석들을 찾아 사이트에 올린다. 1,2층이 뒤틀린 집, 외벽이 까만 집, 바닥면적 16㎡(약 4.8평)의 초미니 빌딩, 불꽃놀이가 잘 보이는 집… 원석의 주인은 그 공간의 가능성을 알아보는 사람이다.

 

“공간을 스스로 선택하고, 만들고, 사용하고, 즐기는 행위는 원래 자유롭고 근원적인 행위였을 것이다. 그런데 부동산 업계는 묘한 시스템을 만들어 자본의 논리에 따르고 있다. 물건은 조건으로만 평가 되고, 보이지 않는 분위기나 정서는 뒷전이다. (…)사는 이의 체취가 배어든 물건은 다양한 매력을 뿜어낸다. 그곳에는 생생한 삶의 현장이 있다.”(바바 마사타카 도쿄R부동산 대표)

 

황수현 기자 sooh@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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